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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동인도회사의 몰락과 가상자산거래소 지분 규제의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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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분 분산 규제, 제2의 동인도회사 낳을까
책임지는 민간, 소송 가는 공공의 아이러니
‘주인 없는’ 공공 인프라, 책임은 누가 지나
J.P. 모건의 서재가 당국에 던지는 질문


 

1602년 설립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는 민간 모험자본이 인류 역사를 바꾼 상징적 존재다. 국가가 리스크를 두려워할 때 민간은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를 세워 거대한 부를 창출했다.

그러나 성과가 가시화되자 국가는 ‘공공성’을 명분으로 개입을 시작했다. 이사회는 관료들로 채워졌고, 경영의 긴장감을 상실한 VOC는 결국 국가에 인수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반면 1907년 미국 금융공황 당시 국가를 구한 것은 국가가 아닌 민간 금융인 J.P.모건이었다. 중앙은행도 구제금융 자금도 없던 시절 그는 자신의 서재로 동료 금융인들을 불러 모아 사재를 털어 시장의 패닉을 진정시켰다. 진정한 ‘민간의 책임’이란 위기 앞에서 스스로 지갑을 열어 수습하는 것임을 보여준 일화다.

약 120년이 흐른 지금 한국의 가상자산 거래소를 둘러싼 ‘지분 분산 규제’ 논의는 이 두 역사적 장면을 묘하게 오버랩시킨다.

최근 금융당국은 한 가상자산 거래소의 오지급 사태를 언급하며 “거래소는 공공 인프라이며 책임성 강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최근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을 복기해 보면 과연 당국이 말하는 ‘공공’과 ‘책임’의 거리가 얼마나 가까운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해당 거래소의 오지급 사태 직후 대다수 이용자는 코인을 임의로 처분하지 않았고 거래소는 시세 변동으로 손해를 본 이들에게 민원 제기 여부와 무관하게 즉각 110%를 배상했다. 과거 다른 거래소 역시 해킹 피해를 소송 없이 자발적으로 배상한 바 있다.

이는 기존 제도권의 대응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과거 모 증권사 착오배당 사태 후 3년 넘게 소송이 이어졌고 작년 3월 한국거래소 전산 오류 및 거래 중지 사태 당시에도 피해를 입은 투자자들은 기나긴 소송전에 나서야만 했다.

나아가 경찰, 검찰, 국세청 등 국가기관조차 압수·보관 중이던 가상자산을 탈취당하거나 관리 부실을 드러낸 사례가 적지 않았다. 적어도 이 시장에서는 ‘공공의 책임’보다 ‘민간의 책임’이 훨씬 더 무겁고 즉각적으로 작동해 온 셈이다.

당국은 지분 분산을 통해 책임성을 강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지분이 완벽하게 분산된 한국거래소나 넥스트레이드의 수장 자리는 늘 전직 관료들의 몫이었다.

금융감독원 공시를 살펴보면 2009년 이후 한국거래소나 한국증권금융처럼 지분이 분산되고 관료 출신 기관장이 부임하는 기관들에 대한 제재 사례는 손에 꼽을 정도다.

무효로 판명 난 상장폐지 결정이나 우리사주 착오배당 사태 등 굵직한 사고 앞에서도 엄중한 책임 추궁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과연 ‘지분 분산’과 ‘관료적 통제’가 진정한 ‘책임’으로 이어지는지 근본적인 회의가 드는 대목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동안 ‘법률 제정을 통한 가상자산 시장의 규율’을 애타게 외쳐온 것은 당국이 아닌 산업계와 이용자들이었다.

보다 못한 국회가 나서 일부 법안을 마련했지만, 금융당국의 후속 입법은 지지부진했다. 최근 발생한 거래소 사고들에 대해 마땅한 제재 근거조차 불명확한 것은 이러한 입법 미비 탓이 크다.

가상자산 시장의 납세자들은 ‘시장 신뢰가 곧 생존’이라는 뼈저린 법칙을 안다. 그렇기에 소송 없이도 타인의 손실을 기꺼이 책임지고, 오지급된 자산을 탐하지 않는 성숙함을 보여주었다.

이제는 공공이 답할 차례다. 스스로 금전과 직(職)을 걸고 시장에 책임지는 모습을 얼마나 보여주었는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관료적 개입이 경영의 긴장감을 앗아간 동인도회사의 몰락과, 사재를 털어 위기를 막은 J.P. 모건의 서재가 우리에게 던지는 묵직한 교훈이다.

[차상진 법무법인 비컴 대표변호사]